
한국에 돌아와 붐비는 지하철에 앉아 있다가, 밤늦은 시각에 편의점에 가다가,
따뜻한 물로 마음껏 샤워를 하다가, 문득문득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케냐의 끝없는 대자연, 소똥집과 염소떼, 내 창문을 꽉 채워주던 은하수,
까맣고 작은 아이들의 목소리와 손의 감촉...
그곳에서의 지난날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서울의 생활은 가끔씩 영화 속 장면들처럼 괴리감이 느껴진다.
차로의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오지마을 ‘일마르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차로 4시간 동안 길도 없는 산길을 덜컹대며 달리다 보면
온통 나무와 풀 뿐인 대자연 한 가운데에 마사이 마을이 나타난다.
비를 쫓아 소를 몰고,
구름과 해의 움직임을 읽으며 광활한 자연 그대로를 느끼며 사는 마사이의 삶.
전기와 물조차 상시 공급되지 않는,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그곳에 산다는 것은
경이롭고도 경외로운 일이었다.
굿피플 케냐사업장은 원거리 간헐적 지원이 아닌,
마을 내에 직접 지부를 두고 거주하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을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보건소 및 우물이 완공되어 운영 중에 있고,
아동결연 사업을 통해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 신장에 힘쓰고 있다.
이처럼 의료, 아동교육, 식수사업 등 생활전반에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보다 심층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꿈꾸고 있다.
나의 주 업무는 아동결연 사업을 총괄하고, 보건소에 상주하며 행정사안을 돕는 것이었다.
오지마을에서의 의료보건과 아동교육 사업은 곧 마을사람들의 인권 그 자체이며, 삶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면서 나는 책이나 TV에 자주 회자되는
화려하고 개성 있는 문화 이면에 자리 잡은 그들의 깊은 고통을 마주해야했다.
일마르바에 보건소가 생기기 전,
인근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험한 돌길을 6시간 이상 걸어 나가야 했고,
해열진통제 몇 알을 얻기 위해 염소 한 마리와 물물교환을 해야 했다.
극심한 가뭄과 때 아닌 홍수의 반복으로 환절기마다 수인성질병에 시달리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여중생들의 임신과 자퇴는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고,
미흡한 산후관리는 산모의 생명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보건지식의 부족으로 에이즈는 확산되고 대물림되었다.
비위생적인 환경과 영양부족으로 아이들은 만성적인 피부질환과 기아로 고통 받았다.
“학교가 끝나면 뭘하니?”
“소와 염소를 몰고 저 산 너머 들판에 가요.”
4~5살이 넘으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가축몰이를 하고,
10여세를 넘긴 여자아이들은 조기결혼을 강요받거나,
저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궂은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길을 걸어가 우물에서 물을 긷고,
그 귀하디 귀한 물이 새까만 구정물이 될 때까지 아끼고 아껴가며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집안일을 척척 해내는 아이들의 그 야무진 손은,
굳은살이 박혀버린 아이들의 맨발은, 나를 슬프게 했다.
2010년 초 보건소가 완공되고 본격적인 의료지원 및 아동결연 사업이 시작되면서
일마르바에 시원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마을사람들은 1년 365일 문을 여는 보건소를 통해
한화 500원 정도의 저비용으로 안전하고 전문적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일종의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여 학생들의 의료비를 지원함으로써,
모든 아이들이 차별 없이 건강한 삶을 영위해 나가도록 했다.
계절마다 아이들에게 감기약과 구충제, 결막염 예방약을 보급하는 것도 주 업무 중 하나였다.
하루 평균 15명에서 장날에는 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보건소를 찾았다.
일마르바 보다 더 깊은 산골 오지에 거주하는 마사이 주민들을 위해
한 달에 두 세 차례 이동진료를 다니기도 했다.
자동차에 의약품을 싣고서 외진 마을들을 찾아다니면,
마을주민들은 아이를 엎고 어르신을 부축하고 산에서 들에서 모여든다.
황량한 들판이었던 곳이 이내 100여명의 사람들로 시끌벅적해 진다.
어쩌면 지쳐있는 그들에게 건넨 몇 알의 알약과 우리들의 관심과 위로는,
의료진료 그 이상의 치유였는지도 모른다.
아침 일찍 시작된 진료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끝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꼭 우리의 손을 잡아끌고서 십시일반 준비한 음식거리를 내온다.
여간해서는 잡지 않는 염소를 잡아와 다리 한 쪽을 불쑥 내미는 그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은,
기아와 질병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었다.
본격적인 아동결연 사업이 시작되면서,
굿피플 케냐 사업장은 최우선적으로 아이들이 학비문제로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했고,
집안형편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입학시켰다.
직접적으로 후원자가 연결된 140여명의 아이들에게는 새 신발과 교복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 같은 직접적 교육지원을 통해 아동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학업에서 배재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또한 지역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놀이터 부지를 마련하고 시소, 그네, 미끄럼틀 등의 놀이시설도 마련해 주었는데,
주변 일대의 마사이마을을 통틀어 이러한 놀이터 시설을 갖춘 곳은 일마르바가 유일했다.
아이들의 영양상태 개선을 위해 유치원 급식을 지원했고,
학교가 쉬는 매주 토요일에는 아이들이 끼와 재능을 맘껏 발산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예체능교육을 실시했다. 100여명의 아이들은 가축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는 대신
노래와 춤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함께 체육활동을 하며 아이답게 웃고 떠들며 하루를 보냈다.
아동결연 프로그램 진행 후 아이들의 복장상태 및 교육환경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
학교 측은 학비지원을 통해 매학기 안정적인 재정확보가 가능해지자
아동복지에 더욱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일마르바의 변화는 입소문을 타고 인근에도 전해졌고,
교육에서 소외된 채 살아온 이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처음 80여명이었던 유치원 아이들은 2010년 말 110여명이 되었으며,
초등학교에도 지속적으로 입학생이 증가했다.
사람들은 아동결연사업을 축복이라 말했다.
나는 매월 초 추가로 후원자가 연결된 아이들의 명단을 알리는 것이 짜릿했다.
결연이 맺어진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의 얼굴에 번지던 그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아동결연사업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나는 ‘일방적인 지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웠다.
현지 사람들의 needs를 파악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인식변화와
주민들의 empowerment를 이끌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인 이론과 최빈국의 실상은 잘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옥수수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지식고양과 인식변화의 중요성만을 제창할 순 없었다.
당장에 그들의 실질적 needs는 끼니를 제 때 챙겨 먹거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담요 한 장을 지급받는 것,
아주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마르바에서의 사업은 어쩔 수 없이 일부분 긴급구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을 맞닥뜨릴 때 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거기서 내가 찾은 해답은 주민참여를 이끄는데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무언가를 공급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면,
대가없는 퍼주기 식은 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했다.
아이들 급식을 위한 식자재는 지원하되, 음식 조리와 급식자재 관리를 위한 인력은 주민들이 충당하게 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나 급식소를 건축할 때에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하도록 호소했고,
무상 이동진료 시 마을사람들이 행사진행을 돕도록 했다.
또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생각과 에너지를 공유하기 위해,
학교 관계자 및 아이들과 최대한 자주 만나려 애썼다.
마을자치회와 함께 사업에 대한 중요사안을 논의했고,
학부모 미팅을 주도하여 아동결연 정책에 대한 의견과 피드백을 듣는데 집중했다.
산 속 깊숙이 숨어있는 집들을 온종일 찾아다니며 가정방문을 하고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지역주민들을 사업에 적극 개입토록 하여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사업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점차 자신을 사업 구성원으로 느끼며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진정으로 내 마을과 내 아이를 위한 일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종종 케냐의 다른 부족 사람들조차 굳이 전통문화를 고수하며
불편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마사이족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물며 한국에서 20여년을 편히 살던 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굶주림을 느껴본 적도,
약 한 알이 없어 아픔을 그저 참고 견뎌야 했던 적도,
어린 동생들을 위해서 배움을 포기해야 했던 적도 없다.
이런 내가 그들을 돕겠다고 나선 것은 어쩌면 오만이었는지 모른다.
1년의 시간은 처절한 배움의 시간이었고 그들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개도국 사람들은 원조에 의지하려는 근성이 문제다’라는 식의 말을 할 수 없다.
어째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지, 어째서 바랄 수밖에 없는지,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벼룩에 수십 방 물려 몸 곳곳에서 진물이 흘러도,
며칠씩 전기가 끊기고 물을 구할 수 없어도,
나는 그곳에 사는 것이 좋았다.
책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짜 행복과 아픔, 진짜 고민과 해답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대접하겠노라며 1시간이 넘도록 불을 피워 차 한 잔을 내오시는,
내 손에 수줍게 달걀 두어개를 쥐어 주는 이 사람들이 나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사무실 일대를 가득 메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사랑했다.
현지사람들의 해맑은 미소, 그것 하나면 나는 충분했다.
주민들과 함께한 소소한 행복들이 있기에 나는 언제나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나의 서러웠던 눈물들은 그분들의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몇 십 배 보상을 받았다.
처음 케냐 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많은 것들을 놓아야 했다.
안정적인 생활의 궤도에서 벗어나,
2010년 한국에서 만들 수 있었던 추억을 포기했고,
딸이 편히 살기를 바라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저버리면서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결정을 결단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케냐 일마르바, 바로 그곳에 그들이 있었기에...
글_ 해외봉사단 김은아 단원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했던가!
내게도 불현 듯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민간단체 해외봉사단으로서 케냐에 가게된 것이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행동하는 젊음이 되기 위해 나는 단번에 이 기회를 붙잡았다.

GPD1기교육과 해원협 합숙교육, 선배단원들과의 만남, 현지사업 인수인계 등 많은 교육을 받고난 후,
나는 의외로 아프리카에 대해 담담해졌다. 그곳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을 깨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양오현 회장님과의 간담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편견을 버리고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임하라.’...

‘사람’을 얻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인간관계,
그 속에서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배우고, 내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리라.
또 나는 그들을 향해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절대 ‘불쌍’한 사람으로 보지 않겠노라고. 그들의 삶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나는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불편한 삶에 안주하지 않도록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케냐로 간다.

커다란 변화의 돌풍을 불러일으키겠노라 말한다면 이는 큰 오만일 것이다.
다만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려할 때 그 곁에서 땀을 식혀주는 산들바람이 될 것이다.
‘굿피플, 일 참 잘하더라.’라는 말을 듣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이다.
앞으로의 1년이 나 김은아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그리고 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지만, 매순간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맡은 일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고 오겠다.
훗날 2010년을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게, 케냐와 진하게 사랑하고 오겠다.
-2010년 해외봉사단 김은아 단원(케냐)-
오랜만에 후배들을 만날 때면
해외자원봉사에 대해 물어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봉사를 다녀온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만
관심을 갖고 물어오는 녀석들은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그런 경험이 또래들의 인기있는 통과의례로 자리잡았기 때문인지
봉사라는 가치가 정말 주목받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해외봉사에 관심을 갖는 친구들이 늘어난다는건 반가운 일이었다.
동남아 오지에서 맨발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아프리카의 어느 빈민가 골목을 누비며 활동하는 모습..
정도로 대표되는 그들 상상 속의 해외봉사단.
다소 단순화되고 단편적으로 그려진 면이 없진 않지만
그런 고생스런 모습 속의 숨겨진 가치를 알고
그것을 뜨거운 가슴으로 동경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친구들의 깊은 마음이 고마웠다.
2004년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굿피플의 해외봉사단도
매년 꾸준히 늘어 올 해는 6명이 해외사업장에서 활동 중이다.
케냐의 초원, 베트남의 시골마을, 필리핀의 산속 오지까지.
어느 곳 하나 편하고 만만한 곳이 없지만
젊음의 한토막을 의미있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한 이들에겐
적당한 고생이 오히려 양념처럼 느껴질 것이다.
올해 봉사단이 파견된지도 3개월 남짓.
눈길 닿는 곳마다 어색함 투성이던 몇 주가 지나고
아직은 향수병을 염려할 것도 아닌 이맘 때가
나름의 사명감으로 한창 눈이 반짝거릴 때다.^^
또 다른 눈으로 사업현장을 누비며 담아낸 사진들과
따뜻한 감성으로 적어나간 글을 보내오는 요즘.
그저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은 사람들까지도
현지의 생생한 풍경을 머리 속 가득 그려보게 해준다.


까맣게 그을려 제법 현지인과 어울리는 얼굴과 덥수룩한 수염,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작업중인 뒷모습.
그 부모님들께서 보셨다면 고생하는 자식들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겠지만
평생 가슴에 남을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는 그들에겐
쌓이는 추억과 즐거움이 더 클 것이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 경험하는 외국생활 자체가
그 이유 중에 작은 하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나만을 위한 고민에 에너지를 쏟고
비슷한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경쟁하던 무거운 틀을 벗어나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책임감 느껴야할 이 세상 누군가의
삶의 모습들을 직접 보고 경험한다는 것.
좀 더 넓고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볼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야말로
몇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귀국 후엔 나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 다양하게 살아가겠지만
평생의 어느 순간에 또 다시 그런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
물론 봉사단으로서의 매일이 출국 전 상상하던 것처럼
보람있고 기쁜 일로만 가득할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싶은 갈등과 실망의 요소들도
가득하다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다만, 이 다음 언젠가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하루를 살아보겠다고 고민하던 순수함과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쓰던 치열한 시간들이 그리울 때가 온다면
마음을 다잡으며 추억할 그 순간이 있다는게
꽤나 든든한 재산이 되어줄 것이라고
나름 자신있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케냐의 재호와 진성, 베트남의 승연.
필리핀의 현옥, 혜영, 택희.
2009년, 굿피플과 함께 그 든든한 재산을 쌓아가는 이 6명의
또 다른 추억을 위해.. 출국 전의 풋풋한 모습을 살짝 공개한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함에 비웃다가
왠지 모를 부러움이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바로 다음이 당신 차례일지 모른다.^^

쏘바~ 오늘은 우리 아버지 센테로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오르망케키 마을의 촌장이시고, 나망가 자치단체 부의장을 맡고 있지요.
하지만 센테로는 평소에 어깨에 힘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대접 받으려 한다거나 하지 않아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죠. 가족 자랑은 나중에 또 다시 하기로 하구요,
오늘은 약속대로 우리 집 자랑을 한번 해보도록 할께요. 센테로가 좋아하는 모습 보이시죠?
이게 바로 굿피플과 코이카의 후원을 얻어 벌인 나망가 주택개량사업의 결실. 바로바로 벽돌 주택입니다.
아직 다 지어지진 않았지만 몇 일 후면 우린 여기에서 살 수 있게 된답니다.
사실 저는 너무 좋아서 이미 이 안에서 잠을 자고 있지요. 하지만 그건 비밀이랍니다.
지난번에 우리 마사이족의 집은 무엇으로 만든다고 했었죠?
소똥이었죠~ 소똥 집에 살아야 하는 비눅이 어쩌다 벽돌집에 살게 됐을까요?
그걸 설명하려면 예전 집으로 돌아가야해요 그래야 이해가 되실꺼에요.
그럼 저와 함께 소똥집으로 가시겠습니다.
이게 바로 소똥 집이에요.
굵은 나뭇가지를 주워다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가는 나뭇가지를 엮어 넣죠.
그 다음이 소똥입니다. 방금 생산된 따끈따끈 김이 모락모락 하는 소똥을 주워다가
뼈대 위에 바르는거죠. 소똥은 밤에 가축들을 집 울타리 안에 가둬두기 때문에
아침 무렵에는 꽤 많은 양을 쉽게 얻을 수 있어요. 그걸 가지고 엄마들이 집을 짓기 시작한답니다.
엄마들마다 한 채의 소똥 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통 혼자서 짓곤 하죠.
그래서 소똥집의 키는 엄마의 팔길이까지 입니다.
그래서 키가 큰 제가 집에 들어갈 때는 허리를 반으로 접어야 들어 갈 수 있게 되죠.
겉만 봐서는 소똥집의 진가를 알지 못하니 안으로~
서 계시면 머리 다치니까 일단 앉으시구요. 차를 한잔씩 대접하는 것이 예의니까
잠시 기다리시면 따뜻한 차와 함께 물 끓이는 아궁이도 보여 드릴께요.
물론 한국의 아궁이와는 다르죠. 그럼 물이 끓을 때까지 집 안쪽을 한번 돌아보세요.
반짝반짝 윤이 나죠? 겉은 햇볕이 따가워서 거북이 껍질처럼 갈라졌지만
안쪽은 식구들이 자꾸 만져서 반짝반짝 매끄럽게 윤이 난답니다.
그리고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도 역시 반짝거리고 있네요.
한국에서는 종이로 도배를 한다던데 마사이족은 떠돌이 유목민이라 언제 이사를 갈지 몰라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 살아간답니다.
옆쪽에서는 마마(아줌마)들이 차를 끓이느라 소란스럽군요.
아궁이 보여 드릴께요 마마들! 옆으로 좀 비켜보세요. 저희 동네 사람들은 모두 말이 참 많아요.
작은 일 하나를 할 때도 토론을 즐기기 때문에 그런거죠.
어쩌다 싸움을 할 때에도 우리는 폭력보다는 논쟁을 통해서 해결하곤 한답니다.
마사이족 특유의 용맹함은 다른 부족이 마을에 침입하거나,
맹수가 가축이나 사람을 노리고 덤벼들 때 사용한답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키우는 소나 양처럼 온순하게 살아가지요.
그러나 최근에 다른 마을에서는 외부와 접촉이 잦아져 가끔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하지만 아직 우리 마을에 그런 사람은 없었답니다. 
우리 집 아궁이에요. 이런! 설명하려니까 불이 꺼지려고 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사이족은 언제 어디서나 나무만 있으면 불을 피울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정말 불이 꺼지면 큰일이에요. 엄마가 아버지께 야단을 맞게 되거든요.
집 안의 아궁이는 집을 따뜻하게 하고, 차를 끓여주고, 우갈리(옥수수가루떡)도 만들고,
가베지(채소)도 볶습니다. 적도 지방에서 따뜻한 건 왜 찾냐구요?
아프리카는 책상지형이라고 해서 대륙 중앙이 불쑥 솟아 있습니다.
고원 지대죠. 그래서 낮의 강렬한 태양과 더불어 밤의 서늘함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밤엔 보온이 필요한거죠. 엘레와?^^
엘레와는 ‘알았어?’ 라는 뜻이지요.

아궁이 설명에 옆집 할머니가 왜 등장했을까요?
환하게 웃고 있는 옆집 할머니 모습인데요. 할머니 눈을 한번 봐주세요.
아이구 눈꼽이 잔뜩~ 아니에요 할머니는 성격이 깔끔하셔서 세수를 잘 하신답니다.
그럼 이건 뭐냐구요? 눈병이에요. 마사이족은 태어날 때 아주 건강한 눈을 갖고 태어납니다.
1km떨어진 곳에 서있는 사람이 누군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죠.
하지만 집 안에 있는 아궁이는 아주 매운 연기를 뿜어내지요.
게다가 타고난 재가 날려 먼지도 아주 많아요. 그래서 아이들은 눈병에 자주 걸리게 된답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면 백내장에 걸리거나 할머니처럼 앞이 잘 안보이게 되는거죠.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세요. 할머니는 여러분이 마을을 찾아와주면 언제라도 행복하니까요.
엘림 클리닉이 조금 더 빨리 세워졌더라면 할머니도 우리처럼 건강한 눈을 가질 수 있었을텐데…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 센테로도 백내장이 시작된 것 같네요.
얼른 제가 소를 열심히 키워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가까이서 보니 더욱 잘생겼죠? 재호가 물을 나눠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엘림 베이스까지 태워다 준다고 해서 저렇게 싱글 벙글이 되셨답니다.
하긴 기도 하실 때 빼고는 늘상 웃는 모습뿐인 밝고 맑은 우리 아버지 센테로 입니다.
모두 몇 명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학교를 못다녀서 숫자를 10까지 밖에 셀 수 없거든요.
엘림마을 응오네네 가족들인데요, 네? 가족이라니까요 한!가!족!
왼쪽에 양복입은 키세메이 아저씨가 가장이구요
그 옆에는 일부다처제의 마사이족 관습에 따라 여러 명의 부인들과 자식들.
아직 장가 간 아들이 없어서 손자는 없는 우리 부족 속에서는 아주 전형적인 가정의 모습입니다.
소 치러 나갔는지 안 보이는 사람도 몇 명 있네요.
아무튼 이 많은 사람들이 방금 전 그 작은 소똥 집에서 살고 있는 거에요.
그러던 어느 날~ 공정길 지부장님께서 우리 마을 집을 신식으로 개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굿피플과 손을 잡고 말이죠.

왼쪽에 벽돌 정리하는 사람이 우리 형 수푹입니다. 별명은 스프에요.
가끔 스튜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그래도 우리 형은 언제나 저렇게 벽돌을 찍고 있습니다.
우리 직장 내에서도 꽤나 힘든 일 중에 하나인데,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는 중이랍니다.
저 벽돌이 바로 우리 집을 만드는데 쓰인 그 벽돌이거든요.
우리는 주택개량 사업 덕분에 집도 생겼고, 형은 직장도 얻었죠.
예전에는 몇 일 동안 나무를 베어다가 밤을 세고 숯을 구워서
타운에 나가 파는 게 직업이었던 우리 형이 반듯한 직장을 갖게 되었고,
형을 따라 저도 엘림의 경비원이 될 수 있었답니다.

뒤에는 이런 광경인거죠. 2인 1조로 일을 하는데, 한 명은 저렇게 온 힘을 다해 벽돌 기계에 매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삽으로 기계에 벽돌 반죽을 붓고, 찍혀 나온 벽돌을 건조시키기 위해 줄을 맞춰 쌓습니다.
이러다가 기운이 빠지면 교대를 하죠. 벽돌은 시간이 흘러서 햇볕을 심하게 쬐고,
비를 자꾸 맞으면 약해지기 때문에 주택건설 일정에 맞추어 그때마다 생산하게 됩니다.
많이 힘들텐데도 우리 수푹 형은 힘든 내색 없이 아침에 출근했다가,
해질 무렵 자전거에 물을 가득 싣고서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옵니다.
물론 그때가 제 출근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물탱크 주변에서 자주 마주치곤 한답니다.

다 지어진 개량 주택의 모습이에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죠? 세 칸 일자형 집의 형태랍니다.
가운데 문으로 들어서면 거실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하나씩 있는 모습이지요.
방도 넓어서 다섯 명도 넘는 사람이 한 방에서 잘 수 있어요.
얼른 우리 집도 완성 되어야 우리 예쁜 엄마랑 동생들이랑 함께 지낼 수 있을 텐데.
곧 지어진다고 하니 기다려 봐야죠… 어! 저기 문이랑 창문을 실은 트럭이 오는 소리가 들리네요.
얼른 가봐야겠습니다. 업무 시간 외에 일을 도와주면 가끔 사탕을 얻을 수 있거든요 ^^
다음엔 물탱크 이야기 해 드릴께요. 기대하세요! 쎄레~
카리브(환영합니다)~
아프리카 케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쏘바~ 안녕하세요 비눅입니다. 잘생겼죠?
나이는 18세. 마사이족 청년이죠.
마사이족은 아프리카 동부 케냐와 탄자니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전통부족입니다.
사진 속 이곳은 나망가 오르망케키에 있는 저희 집입니다.
저희 집은 소똥으로 만들지요.
이곳은 건조한 기후의 지역이라 물은 사람과 소들이 먹기에도 늘 모자랍니다.
그래서 마사이 족은 늘 물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목민입니다.
그래서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인 신선한 소똥을 이용해서 여자들이 집을 짓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훗날을 기약하기로 하구요,
우선은 이곳에 도착한 이방인들에 관한 설명을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프리카다운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이 시멘트와 철근의 조합은 무엇일까요?
제 직업이 바로 이 물탱크를 지키는 일입니다. 아스까리라고 하는데 경비원을 말하는거죠.
저는 해질 무렵 이곳에 출근해서 밤을 꼬박 세우며 이곳을 지켰습니다.
뭐 주워갈 것은 없어도 소랑 염소들이 철없이 물 마시겠다며 이곳으로 뛰어들곤 하거든요.
그것을 막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물론 도둑이 들면 세계 최강의 용맹함을 자랑하는 마사이의 모습도 보여줘야겠지요.
2009년 3월의 어느 날 오후, 이곳에 그들이 도착했습니다.
진성과 재호 굿피플 해외 봉사단이었습니다.
왼쪽이 진성, 오른쪽이 재호입니다.
항상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아서, 저희 새집에 쓸 문틀을 만들고 있는 사이에
몰래 찍은 사진입니다. 변변한 장비가 없는 이곳에선 작업 준비를 위해 늘 뛰어다녀야 한답니다.
자, 그럼 다시 물탱크에 관한 설명을 이어가도록 할께요. 
저희 마을에서 18km 떨어진 올드니어락 산의 저수지 모습입니다.
오른쪽에 서 계신 분이 바로 굿피플 케냐 공정길 지부장님이십니다.
우리 마을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분이시죠.
제가 꼬맹이였던 97년 1월 케냐에 오셨는데 그 다음부터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말로 하자면 끝이 없구요, 그 옆에 계신 분은 손님이신데 누구시더라…
아! 한국에 코이카라는 단체가 있다는데 그곳에서 오신 분이라고 했던것 같아요.
굿피플에서 진행하는 수로사업에 대한 평이 좋아서 점검하러 오셨다고 하셨어요.
아무튼 우리 마을에 오는 파이프는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바위에 못도 박고 쇠줄도 묶고, 낭떠러지 지나고 덕분에 저희 마사이족도 참 힘들었죠.
우리 마을 일인데 지부장님 혼자서만 일하시게 둘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모두 함께 땀 흘려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첫 인사 시간이니까 고생한 얘기는 또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구요.
400톤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가 세워지는 마을 언덕입니다.
언덕에서 볼 수 있는 암보셀리 국립공원이나 킬리만자로 산 보다
우리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물입니다.
잊기 전에 말씀 드려야겠네요. 이 자리를 빌려 나망가 마사이족을 대신해서
지부장님과 소중한 후원의 손길 부어주신 굿피플 가족 여러분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아싼떼~(감사합니다)
다시 진성과 재호가 온 첫날입니다.
그들은 그날 오후 갑자기 우리 마을에 와서는 직원들과 함께
시멘트 모래 자갈을 섞기 시작하더니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 후까지 일을 했어요.
저야 물론 옆에서 구경만 했죠. 그날은 이곳에 사자가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염소나 소들 그리고 도둑도 말이죠. 얼른 나타나야 제 실력을 보여 드릴텐데 말이죠^^
아침부터 시작해야 하루 안에 마칠 수 있는 일을 이번에도 역시 해내고 말았습니다.
시멘트를 하루 안에 부어 넣지 못하면 날씨가 더워서 반으로 뚝하고 갈라져 버리거든요.
우리의 소중한 물탱크를 망가지게 둘 순 없죠.
밤이 찾아왔습니다. 다들 밤 9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더라구요.
덕분에 제가 잠드는 시간도 늦어졌죠.
경비원이 잠을 자면 되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우리 마사이족은 동물 같은 감각을 지녔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그리고 저는 낮에, 월급 모아 마련한 제 가축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잠을 꼭 자야 한답니다.
요즘은 가뭄이라 풀과 물이 귀해서 평소보다 더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하거든요.
아무래도 경비원 그만하고 농사일을 배워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잠들어야 할 시간이 되었네요. 내일은 우리 집 보여 드릴테니 기대하세요.
쎄레~(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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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홍 2011/12/09 20:4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더욱더 빈민촌에 교육 위생 보건 복지가 이루어 졌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