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 돌아와 붐비는 지하철에 앉아 있다가, 밤늦은 시각에 편의점에 가다가,
따뜻한 물로 마음껏 샤워를 하다가, 문득문득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케냐의 끝없는 대자연, 소똥집과 염소떼, 내 창문을 꽉 채워주던 은하수,
까맣고 작은 아이들의 목소리와 손의 감촉...
그곳에서의 지난날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서울의 생활은 가끔씩 영화 속 장면들처럼 괴리감이 느껴진다.
차로의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오지마을 ‘일마르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차로 4시간 동안 길도 없는 산길을 덜컹대며 달리다 보면
온통 나무와 풀 뿐인 대자연 한 가운데에 마사이 마을이 나타난다.
비를 쫓아 소를 몰고,
구름과 해의 움직임을 읽으며 광활한 자연 그대로를 느끼며 사는 마사이의 삶.
전기와 물조차 상시 공급되지 않는,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그곳에 산다는 것은
경이롭고도 경외로운 일이었다.
굿피플 케냐사업장은 원거리 간헐적 지원이 아닌,
마을 내에 직접 지부를 두고 거주하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을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보건소 및 우물이 완공되어 운영 중에 있고,
아동결연 사업을 통해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 신장에 힘쓰고 있다.
이처럼 의료, 아동교육, 식수사업 등 생활전반에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보다 심층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꿈꾸고 있다.
나의 주 업무는 아동결연 사업을 총괄하고, 보건소에 상주하며 행정사안을 돕는 것이었다.
오지마을에서의 의료보건과 아동교육 사업은 곧 마을사람들의 인권 그 자체이며, 삶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면서 나는 책이나 TV에 자주 회자되는
화려하고 개성 있는 문화 이면에 자리 잡은 그들의 깊은 고통을 마주해야했다.
일마르바에 보건소가 생기기 전,
인근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험한 돌길을 6시간 이상 걸어 나가야 했고,
해열진통제 몇 알을 얻기 위해 염소 한 마리와 물물교환을 해야 했다.
극심한 가뭄과 때 아닌 홍수의 반복으로 환절기마다 수인성질병에 시달리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여중생들의 임신과 자퇴는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고,
미흡한 산후관리는 산모의 생명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보건지식의 부족으로 에이즈는 확산되고 대물림되었다.
비위생적인 환경과 영양부족으로 아이들은 만성적인 피부질환과 기아로 고통 받았다.
“학교가 끝나면 뭘하니?”
“소와 염소를 몰고 저 산 너머 들판에 가요.”
4~5살이 넘으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가축몰이를 하고,
10여세를 넘긴 여자아이들은 조기결혼을 강요받거나,
저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궂은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길을 걸어가 우물에서 물을 긷고,
그 귀하디 귀한 물이 새까만 구정물이 될 때까지 아끼고 아껴가며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집안일을 척척 해내는 아이들의 그 야무진 손은,
굳은살이 박혀버린 아이들의 맨발은, 나를 슬프게 했다.
2010년 초 보건소가 완공되고 본격적인 의료지원 및 아동결연 사업이 시작되면서
일마르바에 시원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마을사람들은 1년 365일 문을 여는 보건소를 통해
한화 500원 정도의 저비용으로 안전하고 전문적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일종의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여 학생들의 의료비를 지원함으로써,
모든 아이들이 차별 없이 건강한 삶을 영위해 나가도록 했다.
계절마다 아이들에게 감기약과 구충제, 결막염 예방약을 보급하는 것도 주 업무 중 하나였다.
하루 평균 15명에서 장날에는 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보건소를 찾았다.
일마르바 보다 더 깊은 산골 오지에 거주하는 마사이 주민들을 위해
한 달에 두 세 차례 이동진료를 다니기도 했다.
자동차에 의약품을 싣고서 외진 마을들을 찾아다니면,
마을주민들은 아이를 엎고 어르신을 부축하고 산에서 들에서 모여든다.
황량한 들판이었던 곳이 이내 100여명의 사람들로 시끌벅적해 진다.
어쩌면 지쳐있는 그들에게 건넨 몇 알의 알약과 우리들의 관심과 위로는,
의료진료 그 이상의 치유였는지도 모른다.
아침 일찍 시작된 진료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끝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꼭 우리의 손을 잡아끌고서 십시일반 준비한 음식거리를 내온다.
여간해서는 잡지 않는 염소를 잡아와 다리 한 쪽을 불쑥 내미는 그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은,
기아와 질병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었다.
본격적인 아동결연 사업이 시작되면서,
굿피플 케냐 사업장은 최우선적으로 아이들이 학비문제로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했고,
집안형편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입학시켰다.
직접적으로 후원자가 연결된 140여명의 아이들에게는 새 신발과 교복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 같은 직접적 교육지원을 통해 아동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학업에서 배재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또한 지역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놀이터 부지를 마련하고 시소, 그네, 미끄럼틀 등의 놀이시설도 마련해 주었는데,
주변 일대의 마사이마을을 통틀어 이러한 놀이터 시설을 갖춘 곳은 일마르바가 유일했다.
아이들의 영양상태 개선을 위해 유치원 급식을 지원했고,
학교가 쉬는 매주 토요일에는 아이들이 끼와 재능을 맘껏 발산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예체능교육을 실시했다. 100여명의 아이들은 가축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는 대신
노래와 춤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함께 체육활동을 하며 아이답게 웃고 떠들며 하루를 보냈다.
아동결연 프로그램 진행 후 아이들의 복장상태 및 교육환경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
학교 측은 학비지원을 통해 매학기 안정적인 재정확보가 가능해지자
아동복지에 더욱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일마르바의 변화는 입소문을 타고 인근에도 전해졌고,
교육에서 소외된 채 살아온 이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처음 80여명이었던 유치원 아이들은 2010년 말 110여명이 되었으며,
초등학교에도 지속적으로 입학생이 증가했다.
사람들은 아동결연사업을 축복이라 말했다.
나는 매월 초 추가로 후원자가 연결된 아이들의 명단을 알리는 것이 짜릿했다.
결연이 맺어진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의 얼굴에 번지던 그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아동결연사업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나는 ‘일방적인 지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웠다.
현지 사람들의 needs를 파악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인식변화와
주민들의 empowerment를 이끌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인 이론과 최빈국의 실상은 잘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옥수수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지식고양과 인식변화의 중요성만을 제창할 순 없었다.
당장에 그들의 실질적 needs는 끼니를 제 때 챙겨 먹거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담요 한 장을 지급받는 것,
아주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마르바에서의 사업은 어쩔 수 없이 일부분 긴급구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을 맞닥뜨릴 때 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거기서 내가 찾은 해답은 주민참여를 이끄는데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무언가를 공급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면,
대가없는 퍼주기 식은 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했다.
아이들 급식을 위한 식자재는 지원하되, 음식 조리와 급식자재 관리를 위한 인력은 주민들이 충당하게 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나 급식소를 건축할 때에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하도록 호소했고,
무상 이동진료 시 마을사람들이 행사진행을 돕도록 했다.
또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생각과 에너지를 공유하기 위해,
학교 관계자 및 아이들과 최대한 자주 만나려 애썼다.
마을자치회와 함께 사업에 대한 중요사안을 논의했고,
학부모 미팅을 주도하여 아동결연 정책에 대한 의견과 피드백을 듣는데 집중했다.
산 속 깊숙이 숨어있는 집들을 온종일 찾아다니며 가정방문을 하고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지역주민들을 사업에 적극 개입토록 하여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사업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점차 자신을 사업 구성원으로 느끼며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진정으로 내 마을과 내 아이를 위한 일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종종 케냐의 다른 부족 사람들조차 굳이 전통문화를 고수하며
불편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마사이족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물며 한국에서 20여년을 편히 살던 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굶주림을 느껴본 적도,
약 한 알이 없어 아픔을 그저 참고 견뎌야 했던 적도,
어린 동생들을 위해서 배움을 포기해야 했던 적도 없다.
이런 내가 그들을 돕겠다고 나선 것은 어쩌면 오만이었는지 모른다.
1년의 시간은 처절한 배움의 시간이었고 그들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개도국 사람들은 원조에 의지하려는 근성이 문제다’라는 식의 말을 할 수 없다.
어째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지, 어째서 바랄 수밖에 없는지,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벼룩에 수십 방 물려 몸 곳곳에서 진물이 흘러도,
며칠씩 전기가 끊기고 물을 구할 수 없어도,
나는 그곳에 사는 것이 좋았다.
책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짜 행복과 아픔, 진짜 고민과 해답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대접하겠노라며 1시간이 넘도록 불을 피워 차 한 잔을 내오시는,
내 손에 수줍게 달걀 두어개를 쥐어 주는 이 사람들이 나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사무실 일대를 가득 메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사랑했다.
현지사람들의 해맑은 미소, 그것 하나면 나는 충분했다.
주민들과 함께한 소소한 행복들이 있기에 나는 언제나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나의 서러웠던 눈물들은 그분들의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몇 십 배 보상을 받았다.
처음 케냐 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많은 것들을 놓아야 했다.
안정적인 생활의 궤도에서 벗어나,
2010년 한국에서 만들 수 있었던 추억을 포기했고,
딸이 편히 살기를 바라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저버리면서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결정을 결단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케냐 일마르바, 바로 그곳에 그들이 있었기에...
글_ 해외봉사단 김은아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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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홍 2011/12/09 20:47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더욱더 빈민촌에 교육 위생 보건 복지가 이루어 졌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