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2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굿피플 사랑나눔봉사단 남성단원 13명이
‘구립영등포노인케어센터’에 봉사활동을 나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홍보팀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단 28분!
서둘러 카메라를 메고 쫓아 나선 홍보팀은
드디어 사랑나눔봉사단의 목욕봉사 잠입취재(?)를 성공했다.
“어이! 신발 갈아 신고 들어가야지!”
노인케어센터의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가는 기자의 등뒤로 굵은 음성이 들려온다.
돌아보니 사랑나눔봉사단원 분들이 익숙하게 실내용 신발로 갈아신으며 웃고 계신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래서 초보 티가 나는게지.’
“안녕하세요, 사랑나눔봉사단입니다!”
바리톤 음역대의 웅장한 목소리가 1층 로비안에 기분좋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내 센터의 직원분들이 반갑게 뛰어나오며 맞아주신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차가 여기저기서 날아오고, 기분 좋은 웃음과 안부인사들이 섞인다.
“아유 우리 원장님은 권사님들 오실 때는 차대접 안하시면서 집사님들한텐 항상 특별대우셔~”
굿피플 사랑나눔봉사단은 2001년 여의도 순복음교회 남선교회를 중심으로
쌀이 없어 굶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시작되었다.
이후 모임이 점차 커지며 사단법인 굿피플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고,
같은 교회 여권사님들이 함께 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은 2주마다 진행되는 목욕봉사를 진행하는 날.
구립영등포노인케어센터에는 매월 둘째주와 넷째주
각각 남성, 여성 봉사단원들이 한 번씩 방문하여 시설에 계시는 치매어르신들의 목욕을 돕는다.

능숙하게 목욕가운을 걸치며 봉사단원들이 봉사준비를 한다.
하지만 모습은 제 각각.
물을 사용하는 목욕봉사의 특성 상 여기저기서 다리를 걷어붙이는가 하면
아예 팬티차림에 목욕가운만 걸치시는 베테랑(?) 봉사단원들도 계신다.
이때 눈길을 끄는 장면 포착. 초등학생 꼬마가 다른 봉사단원들의 가운 매듭을 지어주고 있다.
바로 사랑나눔봉사단 최연소 명예단원 박주엽군(12세).
박재원 봉사단원의 아들인 주엽군은
이래뵈도 6개월 넘게 매주 봉사활동을 쫓아다니는 봉사단의 마스코트다.
목욕을 앞두고 우선 치매어르신들의 생활복 탈의 순서.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꼬박 보는 사이건만 어르신들의 지적수준은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신다.
잡아가지 말라며 화를 내시기도 하고, 옷을 벗지 않으려고 몸을 버팅기기도 하는 와중에도
봉사단원들은 기분 좋은 미소와 능글 맞는 말대답으로 이내 어르신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만다.
3인 1조로 진행되는 목욕봉사.
능숙한 손길로 20분에 한분씩 목욕을 마친다.
아무래도 카메라를 들이밀기 조심스러워 머뭇거리고 있는데
다시 등뒤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조심스러워 할 필요는 없어. 어르신들 얼굴만 안 나오게 잘 찍어봐.
그렇다고 19금 사진은 만들면 안되고. 하하하.”
사랑나눔봉사단 윤국중 단장님이 어느 샌가 나타나셨다.
아마도 봉사초보 기자의 동행이 못내 염려스러웠던 듯 하다.
“우리 몸 힘든건 괜찮은데,
행여 라도 우리 실수로 어르신들 몸이라도 상할 까 항상 조심스럽지요.
한분 한분이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신지 잘 모르고,
여기 직원 분들도 우리한테 일일이 설명해주면서 붙어있을 만큼
인력이 충분한 것도 아니니깐.”
어느 새 봉사활동도 끝나고 막바지.
다 같이 모여 센터의 직원분들과 함께 하루 평가를 꼼꼼이 진행하신다.
보완해야 할 점, 다음 주 계획 등을 챙기다 보니 벌써 해가 뉘엿거린다.
“자 한주들 잘 보내시고, 다음주에도 빠지지 말고 모두 모입시다.”
힘차게 인사하며 헤어지는 모습에서 노력봉사의 피로가 느껴지진 않는다.
문득 악당을 해치우고 쿨하게 돌아서서 말을 타고 사라지는 황혼의 카우보이가 떠오른다.
- 굿피플 사랑나눔봉사단은 2001년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정부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열악한 시설을 중심으로 노인 및 장애인, 아동시설 등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노력봉사, 정서지원 등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

한국에 돌아와 붐비는 지하철에 앉아 있다가, 밤늦은 시각에 편의점에 가다가,
따뜻한 물로 마음껏 샤워를 하다가, 문득문득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케냐의 끝없는 대자연, 소똥집과 염소떼, 내 창문을 꽉 채워주던 은하수,
까맣고 작은 아이들의 목소리와 손의 감촉...
그곳에서의 지난날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서울의 생활은 가끔씩 영화 속 장면들처럼 괴리감이 느껴진다.
차로의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오지마을 ‘일마르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차로 4시간 동안 길도 없는 산길을 덜컹대며 달리다 보면
온통 나무와 풀 뿐인 대자연 한 가운데에 마사이 마을이 나타난다.
비를 쫓아 소를 몰고,
구름과 해의 움직임을 읽으며 광활한 자연 그대로를 느끼며 사는 마사이의 삶.
전기와 물조차 상시 공급되지 않는,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그곳에 산다는 것은
경이롭고도 경외로운 일이었다.
굿피플 케냐사업장은 원거리 간헐적 지원이 아닌,
마을 내에 직접 지부를 두고 거주하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을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보건소 및 우물이 완공되어 운영 중에 있고,
아동결연 사업을 통해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 신장에 힘쓰고 있다.
이처럼 의료, 아동교육, 식수사업 등 생활전반에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보다 심층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꿈꾸고 있다.
나의 주 업무는 아동결연 사업을 총괄하고, 보건소에 상주하며 행정사안을 돕는 것이었다.
오지마을에서의 의료보건과 아동교육 사업은 곧 마을사람들의 인권 그 자체이며, 삶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면서 나는 책이나 TV에 자주 회자되는
화려하고 개성 있는 문화 이면에 자리 잡은 그들의 깊은 고통을 마주해야했다.
일마르바에 보건소가 생기기 전,
인근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험한 돌길을 6시간 이상 걸어 나가야 했고,
해열진통제 몇 알을 얻기 위해 염소 한 마리와 물물교환을 해야 했다.
극심한 가뭄과 때 아닌 홍수의 반복으로 환절기마다 수인성질병에 시달리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여중생들의 임신과 자퇴는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고,
미흡한 산후관리는 산모의 생명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보건지식의 부족으로 에이즈는 확산되고 대물림되었다.
비위생적인 환경과 영양부족으로 아이들은 만성적인 피부질환과 기아로 고통 받았다.
“학교가 끝나면 뭘하니?”
“소와 염소를 몰고 저 산 너머 들판에 가요.”
4~5살이 넘으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가축몰이를 하고,
10여세를 넘긴 여자아이들은 조기결혼을 강요받거나,
저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궂은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길을 걸어가 우물에서 물을 긷고,
그 귀하디 귀한 물이 새까만 구정물이 될 때까지 아끼고 아껴가며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집안일을 척척 해내는 아이들의 그 야무진 손은,
굳은살이 박혀버린 아이들의 맨발은, 나를 슬프게 했다.
2010년 초 보건소가 완공되고 본격적인 의료지원 및 아동결연 사업이 시작되면서
일마르바에 시원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마을사람들은 1년 365일 문을 여는 보건소를 통해
한화 500원 정도의 저비용으로 안전하고 전문적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일종의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여 학생들의 의료비를 지원함으로써,
모든 아이들이 차별 없이 건강한 삶을 영위해 나가도록 했다.
계절마다 아이들에게 감기약과 구충제, 결막염 예방약을 보급하는 것도 주 업무 중 하나였다.
하루 평균 15명에서 장날에는 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보건소를 찾았다.
일마르바 보다 더 깊은 산골 오지에 거주하는 마사이 주민들을 위해
한 달에 두 세 차례 이동진료를 다니기도 했다.
자동차에 의약품을 싣고서 외진 마을들을 찾아다니면,
마을주민들은 아이를 엎고 어르신을 부축하고 산에서 들에서 모여든다.
황량한 들판이었던 곳이 이내 100여명의 사람들로 시끌벅적해 진다.
어쩌면 지쳐있는 그들에게 건넨 몇 알의 알약과 우리들의 관심과 위로는,
의료진료 그 이상의 치유였는지도 모른다.
아침 일찍 시작된 진료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끝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꼭 우리의 손을 잡아끌고서 십시일반 준비한 음식거리를 내온다.
여간해서는 잡지 않는 염소를 잡아와 다리 한 쪽을 불쑥 내미는 그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은,
기아와 질병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었다.
본격적인 아동결연 사업이 시작되면서,
굿피플 케냐 사업장은 최우선적으로 아이들이 학비문제로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했고,
집안형편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입학시켰다.
직접적으로 후원자가 연결된 140여명의 아이들에게는 새 신발과 교복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 같은 직접적 교육지원을 통해 아동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학업에서 배재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또한 지역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놀이터 부지를 마련하고 시소, 그네, 미끄럼틀 등의 놀이시설도 마련해 주었는데,
주변 일대의 마사이마을을 통틀어 이러한 놀이터 시설을 갖춘 곳은 일마르바가 유일했다.
아이들의 영양상태 개선을 위해 유치원 급식을 지원했고,
학교가 쉬는 매주 토요일에는 아이들이 끼와 재능을 맘껏 발산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예체능교육을 실시했다. 100여명의 아이들은 가축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는 대신
노래와 춤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함께 체육활동을 하며 아이답게 웃고 떠들며 하루를 보냈다.
아동결연 프로그램 진행 후 아이들의 복장상태 및 교육환경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
학교 측은 학비지원을 통해 매학기 안정적인 재정확보가 가능해지자
아동복지에 더욱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일마르바의 변화는 입소문을 타고 인근에도 전해졌고,
교육에서 소외된 채 살아온 이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처음 80여명이었던 유치원 아이들은 2010년 말 110여명이 되었으며,
초등학교에도 지속적으로 입학생이 증가했다.
사람들은 아동결연사업을 축복이라 말했다.
나는 매월 초 추가로 후원자가 연결된 아이들의 명단을 알리는 것이 짜릿했다.
결연이 맺어진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의 얼굴에 번지던 그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아동결연사업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나는 ‘일방적인 지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웠다.
현지 사람들의 needs를 파악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인식변화와
주민들의 empowerment를 이끌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인 이론과 최빈국의 실상은 잘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옥수수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지식고양과 인식변화의 중요성만을 제창할 순 없었다.
당장에 그들의 실질적 needs는 끼니를 제 때 챙겨 먹거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담요 한 장을 지급받는 것,
아주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마르바에서의 사업은 어쩔 수 없이 일부분 긴급구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을 맞닥뜨릴 때 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거기서 내가 찾은 해답은 주민참여를 이끄는데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무언가를 공급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면,
대가없는 퍼주기 식은 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했다.
아이들 급식을 위한 식자재는 지원하되, 음식 조리와 급식자재 관리를 위한 인력은 주민들이 충당하게 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나 급식소를 건축할 때에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하도록 호소했고,
무상 이동진료 시 마을사람들이 행사진행을 돕도록 했다.
또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생각과 에너지를 공유하기 위해,
학교 관계자 및 아이들과 최대한 자주 만나려 애썼다.
마을자치회와 함께 사업에 대한 중요사안을 논의했고,
학부모 미팅을 주도하여 아동결연 정책에 대한 의견과 피드백을 듣는데 집중했다.
산 속 깊숙이 숨어있는 집들을 온종일 찾아다니며 가정방문을 하고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지역주민들을 사업에 적극 개입토록 하여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사업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점차 자신을 사업 구성원으로 느끼며 책임감을 갖게 되었고,
진정으로 내 마을과 내 아이를 위한 일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종종 케냐의 다른 부족 사람들조차 굳이 전통문화를 고수하며
불편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마사이족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물며 한국에서 20여년을 편히 살던 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굶주림을 느껴본 적도,
약 한 알이 없어 아픔을 그저 참고 견뎌야 했던 적도,
어린 동생들을 위해서 배움을 포기해야 했던 적도 없다.
이런 내가 그들을 돕겠다고 나선 것은 어쩌면 오만이었는지 모른다.
1년의 시간은 처절한 배움의 시간이었고 그들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개도국 사람들은 원조에 의지하려는 근성이 문제다’라는 식의 말을 할 수 없다.
어째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지, 어째서 바랄 수밖에 없는지,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벼룩에 수십 방 물려 몸 곳곳에서 진물이 흘러도,
며칠씩 전기가 끊기고 물을 구할 수 없어도,
나는 그곳에 사는 것이 좋았다.
책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짜 행복과 아픔, 진짜 고민과 해답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대접하겠노라며 1시간이 넘도록 불을 피워 차 한 잔을 내오시는,
내 손에 수줍게 달걀 두어개를 쥐어 주는 이 사람들이 나는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사무실 일대를 가득 메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사랑했다.
현지사람들의 해맑은 미소, 그것 하나면 나는 충분했다.
주민들과 함께한 소소한 행복들이 있기에 나는 언제나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나의 서러웠던 눈물들은 그분들의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몇 십 배 보상을 받았다.
처음 케냐 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많은 것들을 놓아야 했다.
안정적인 생활의 궤도에서 벗어나,
2010년 한국에서 만들 수 있었던 추억을 포기했고,
딸이 편히 살기를 바라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저버리면서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결정을 결단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케냐 일마르바, 바로 그곳에 그들이 있었기에...
글_ 해외봉사단 김은아 단원

'사람'이 빠진 개발
‘개발’이 한참인 캄보디아에서는 요즘 강제철거와 이주민 문제가 심각합니다.
도시에는 삐까번쩍한 건물들이 들어서고 화려한 색을 입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도심 중앙의 낡은 건물들이 사람들 눈에 거슬리나 봅니다.
그 곳의 주민들은 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는데...
어느 날 찾아온 강제철거의 포크레인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그 곳 주민들의 주거지 뿐만 아니라, 삶을 통째로 부수고 짓밟아버립니다.
5년, 10년 또는 몇 십 년을 그 자리에서 살아오던 주민들은 그 땅에 대한 권리도,
집에 대한 권리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그저 힘없이 망연자실하여 쫓겨납니다.
사실 권리를 주장할 줄 몰랐거나, 주장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이 밟고 사는 그 땅은 그들의 것인데 말입니다.
‘재개발’은 많은 것을 변화시킵니다.
도시빈민들이 가까스로 터전을 닦고 살아가던 거칠고 추한 땅은
부지불식간에 땅값이 치솟아 부동산업자들이 노리는 노른자 땅이 됩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 노른자에서 튀기는 국물조차 맛보지 못하지요.
1990년 이후 지금까지 강제 이주를 당한 주민들이 13만 3천명에 이른다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강제철거현장과 주민들이 강제 이주된 지역들을 현장 방문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먼저 프놈펜 시내 중심의 강제 철거 현장을 찾았는데,
잘 닦인 넓은 개발예정지에 익숙한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쪽에는 우리나라의 P모 대기업이,
다른 한 편에는 G모 대기업이
멋진 고층 건물을 지을 예정이라며 멋진 청사진과 낯익은 깃발을 꽂아두었더군요.
외국에서 만나는 이런 순간은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기업의 활발한 외화벌이를 자랑스러워해야할지,
강제철거 후 당당히 깃발을 꽂아둔 우리 기업을 모른 척 해야 할지..
그저 고개만 떨궈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잔인한 강제철거가 이루어졌던 지역들은 새롭게 들어선 건물들 아래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처럼 묻힌 듯 보였습니다.
한 지역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요?
도시 빈민들이 공간을 나눠 쓰며 촘촘하게 모여 살았을 땅에는
한 두 사람의 재벌이 공간의 낭비가 심해보이는 의리 의리하게 큰 건물들을 지어놓고는
어마어마한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습니다.
씁쓸한 기분으로 이동한 두 번째 장소는 주민들이 강제 이주된 지역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1시간 30분 이상 달렸을까요.
도로가도 아니고 꼬불꼬불 좁은 길을 또 한참 들어간 후에야 차는 멈춰 섰습니다.
컨테이너 박스를 붙여놓은 듯, 커다란 성냥갑을 성의 없이 늘어놓은 듯
강제철거를 감행한 기업에서
그것도 오직 건물주들을 위한 보상으로 건축하여 제공한 주거공간이라는데..
감옥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황량한 주거환경과
구멍만 파놓은 듯한 화장실에 그저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돈은 사람들을 가르고 차별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철거지역의 건물주들 중에서도 좋은 위치에 비싼 건물을 가지고 있던 주인들은
일찌감치 기업과 잘 협상을 해 2층 건물을 받거나 개중에서도 좋은 집을 받았고,
협상에 비협조적이거나 늦게까지 권리를 주장했던 건물주들은
더 안 좋은 집을 받아 더욱 환경이 어려워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이 아니면 정말 갈 곳이 없었던 가난한 세입자들은
어느 날 트럭에 태워 그야말로 ‘떨어뜨려놓고’ 갔다는 강제이주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도시에서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없을 만큼 고립된 곳에
집도 절도 없이 말 그대로 사람들만 ‘덩그러니’ 버려진 격이었습니다.
300가구가 이곳으로 쫓겨 왔지만, 도저히 희망이 없는 이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2년도 채 되지 않아 다들 떠나가고, 나무와 나뭇잎을 이용해 지은 오두막에서
지금은 80여 가구만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강제이주지역 두 군데 모두
한국 사람들이 또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주지역에는
어느 한국 NGO에서 이주 빈민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고,
두 번째 이주지역에서는 한국의 어느 교단에서 교회를 세워 지역사회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한국 사람들의 도움에 고마워했고, 누가 봐도 그런 도움이 절실해보였습니다.

그런데, 세계은행(World Bank)에서는
같은 지역 같은 사람들을 위해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도심에 살던 그 땅의 본 주인인 주민들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캄보디아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강제철거로 정부에서 개발을 진행하는 300헥타르의 땅 중
15헥타르만을 강제 철거된 주민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00헥타르 중 15헥타르.
그 15헥타르만 주면 도심의 경관을 헤치지 않도록 세계은행에서 건물을 짓고
강제 철거된 주민들에게 주거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이것은 연륜 있는 세계은행이
캄보디아 강제철거 이주민을 깊이 배려하고 돕는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주민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우는 모습이 깊은 감동으로 전해졌습니다.
세계은행의 주장에 아직 캄보디아 정부는 묵묵부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개발의 진통을 앓으며 성장해온 우리나라가
지금 그 진통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를 돕는 방법이 이런 방식이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눈에 보이는 필요를 채우는 데 급급하기 보다는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보다 지혜롭고 사려 깊은 대한민국의 ‘情’ 나눔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글_ 김민영 (지구촌 나눔운동 활동가)

우리는 국적도, 생김새도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지만
어려운 이웃이 있는곳엔 어디든 달려가
사랑과 행복을 나눠주는
굿피플 패밀리입니다 !

가족이라는 의미는 사회를 떠받치는 기본 요소가 되기도 하고,
우리들의 삶의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때론 가족이라는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득 찬 사랑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듯, 가족은 우리 각자의 생활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가족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그 안에서의 서로 돌봄과 존중을 실천하며
부족한 부분을 극복하며, 때론 갈등을 해소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가족은 우리가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배움의 장이되기도 하며,
서로를 섬기는 실천의 장이 되기도 한다.
험난한 사회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고, 돌봐주는 가장 안전한 안식처 역할을 한다.
가족이라는 단위 없이는 인간은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외롭고,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가족은 혈연적인 의미를 넘어 일반적인 의미로
서로 다른 환경에 있는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상은 아직도 많은 고아와 과부들이 위험으로부터 노출되어 있고,
보건의료와 교육혜택으로부터 소외 되어있다.
우리는 이러한 보호와 행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러한 관심이 그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발전하여,
우리의 삶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까지 이르러야 한다. 
유엔 보고서에 의하면,
오늘날 100만 명의 사람들이 재해나 분쟁으로 인하여 가족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많은 노인들이 홀로 살고 힘들게 살고 있으며, 젊은 세대들은 그들을 돌봐줄 사람들의 부재에 힘들어 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과 지역의 위험성을 이유로 아이들이 가족을 떠나고 있다.
일부 아이들은 난민촌에 정착하며, 가족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으며,
때로는 노예매매로 인하여 팔려가거나 전쟁을 위한 소년병으로 착출되어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가장 기초적인 인권마저 빼앗긴 아동과 여성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위협과 폭력에 시달리며 강제적인 노동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현재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아동과 여성 인권 유린이 심각한 실정인데,
특히 분쟁 속에서 발생한 난민아동들과 여성들이 주요 대상이 되고 있으며,
가난한 삶 때문에 부모가 아이들을 팔아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내전으로 인한 여성의 신체적, 인격적 공격도 일어나고 있다.
이렇듯, 많은 아이들이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외부적인 여러 요인에 의해서
가족과 자의적, 타의적으로 떨어져 지내고 있으며,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서두에 언급하였듯 가족이 혈연적 의미를 넘어 일반적인 의미로
서로 다른 환경에 있는 인간적인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으로 해석할 때,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 한번쯤은 지구촌에 소외된 이웃들에게도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작은 관심이 필요하다.
글_ 국제교육전문가 손정배(국제개발분야)

굿피플에 자원봉사를 신청하고 파주읍으로 첫 의료봉사를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하는 의료봉사라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역시 들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발걸음도 가벼웠다.
우리는 "사랑의 의료봉사"라는 글씨가 크게 써져 있는 버스를 탔고,
그 버스 안에는 신기하게도 치과의 내부시설과 거의 흡사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파주읍으로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우리는 설렘과 기쁨도 잠시,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고 오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에 잠도 오지 않았다.
드디어, 파주에 도착!
우리는 그동안 굿피플 홈페이지와 소식지 등에서 보아만 왔던
굿피플 조끼를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입을 수 있었다.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사랑을 전해주는 굿피플 봉사자들.
그들의 땀과 눈물의 현장에서 함께했을 조끼를 입어보니 그분들의 늠름함이 나에게도 전해져,
진짜 열심히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본격적인 의료봉사 시작!
이번 의료봉사는 파주읍에 사시는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주민분들을 위한 무료 건강진단과 치료를 병행한 봉사활동이었다.
우선, 치료에 앞서 필요한 여러 가지 의료장비들을 옮기고 의사선생님들의 심부름도 했다.
모든 준비가 다 완료되자, 주민분들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가 맡은 일은 오시는 분들의 성함과 주소 등의 인적사항과 순서를 정해 드리는 일.
병원에 가면 간호사 언니들이 하는 접수업무를 맡았다.
초반에는 실수도 많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져 갔다. 
접수를 받다보니 나를 당황하게 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으시거나, 귀가 잘 안 들리시는 어르신들. 많이 기다리셨는지 화를 내시는 분들 등...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최대한 친절하고 상냥하게,
그분들이 불편하시지 않고 기분 좋게 진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어떻게든 잘 대처해보려 노력했던 점이 나에게는 또 다른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살짝 무뚝뚝한 나로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서 어르신들과 대화하는 법,
사람과 사람사이에 눈빛과 마음으로도 대화하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고 쉴 새 없이 말을 하다 보니 시간도 굉장히 빨리 지나갔다.
이번 의료봉사활동은 단순히 학교에 내야 할 봉사활동 시간 때문에 하는
형식적이고 의무감이 있는 봉사가 아니라,
나에게는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뜻 깊은 경험이 되었다.
그 이유 중의 가장 큰 점은 나의 장래희망이 물리치료사인데,
많은 의사선생님들과 간호사 언니들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쉬는 날 봉사자로서 무의촌을 찾아와 사랑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동기부여가 되었고,
내 장래직업과 연관되어 있는 의료현장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사랑이 넘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 같아 더욱 감사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말로 더 열심히 공부해서 꼭 내 꿈을 이루어 보고 싶다.
그리고 다음에도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가진 시간과 사랑을 질병으로 고통 받는 어르신들을 위해 나눠 드리고 싶다.
글_자원봉사자 경복비즈니스고 이란영

라오스 비엔티안에서의 삶도 어느덧 한달 반(능드안킁)이 지나가고 있다.
처음 라오스 왓따이 공항에 도착했을때 느낌은... 휑~. 하지만 지부장님과 숙소로 향할 때 본
거리의 포장도로, 많은 오토바이 그리고 자가용들... 라오스는 지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여기 수도 비엔티안 만큼은 우리가 말하는 최대 빈민국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2년 전만해도 이렇게 많은 오토바이와 자가용이 없었다고..
여느 나라처럼 이곳도 아침과 저녁에 교통체증이 확연히 늘어나고 있으며 사고도 잦아져 하나의
사회적 이슈가 되었지만, 대부분 외국 자본에 의존하는 라오스 정부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취하지
않고 있다.
여기는 열대기후로 인하여 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특히 낮에는 더더욱. 오후 4시 이후가 되어서야 거리는 활기를 띤다.
유일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외국인여행객!
한번은 나또한 시내를 둘러보겠다고 남푸에서 딸랏사오까지 걸어서 간적이 있다.
이날 나는 더위를 먹고 다시 한 번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현지인이 충고한다. 코코넛주스 등 과일주스를 많이 마시라고.
라오스 사람들은 참 여유롭다. 그리고 느리다. 날씨에 상관없이 이곳은 정전이 많이 난다.
저번엔 천둥번개로 인하여 큰나무가 부러져 전선을 건드렸고,
내가 살고있는 집이 하루종일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체감온도 40도나 되는 상황에서 에어컨, 선풍기, 냉장고 심지어 전력으로 나오는 물까지 나오지 않으니,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아무 대책이 없어 전기가 들어오기만을 간절히... 마인드 컨트롤을 해가면서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라오스인들에게는 이것이 생활이다. 단지 더울 뿐이다.
곧 전기는 들어올 것이고, 그때 되면 일을 다시하면 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것을 통해, 성격이 급한 나는 와이와이(빨리빨리)가 아닌 싸-싸(천천히)와 기다림을 배우고 있다.
버-뻰냥(괜찮다)이라는 말속에서도 라오스 사람들의 문화를 알 수 있다.
때로는 나에게 상대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뻰냥 이란다.
좀 황당하긴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상대에게 소리지르며 화를 내거나 하진 않는다.
거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경적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냥 기다린다.
이곳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언어교육을 받은 후 포장과 비포장도로를 달려
약 3시간쯤 떨어진 렁싼이라는 지역의 학교에서 영어교육과 컴퓨터교육을 할 예정이다.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필수인 나는 이곳 비엔티안에서 열심히 언어교육을 받으며 공부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해맑고 마냥 이쁜 아이들..
하지만 이곳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이들이 직접 경제활동에 나서야 하거나,
학교까지는 거리가 멀어 보낼 형편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다행히 해외원조단체들에 의해 사랑의 도시락 보내기, 학용품 지원사업,
학교 유치원사업, 의료봉사사업 그리고 지도자 양육 등 여러 어린이 지원사업 등으로
이곳 아이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아이들을 위한 생활, 보건 환경 등 여러 시설들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계속 성장해 가고 있는 라오스!
수도에서부터 지역사회까지, NGO 단체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희망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 집안에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조차 제대로 갖추고 살아가지 못하고,
병원시설이 부족해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한 지속적인 희망사업이 운영되고
긍정적인 미래창출효과를 마음껏 누리는 라오스가 되기를 꿈꾸어본다.
나 또한 이곳에서 더 낮아지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더 많이 나누며 배우고 싶다.
글_2010 해외봉사단 이효진 단원(라오스)

재난 상황시 식수개발과 위생의 중요성
Why water & sanitation matters?
지난 1월 12일 서인도 제도 중앙부에 위치한 섬나라 아이티에서 규모 7.0 의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 이 강진의 여파로 수도 포르토프랭스 (Port-au-Prince) 인근의 대통령궁, 공항, 정부청사, 병원 등 대다수 주요 건물이 붕괘됐고,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가 23만 명을 넘어선 가운데 세계 각국에서 급파된 구호 단체 요원들의 재건활동이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번 아이티 대참사의 경우 보건 위생 기반 시설의 파괴와 정부 기능의 마비로 이곳의 위생상태는 피해자들의 생명을 위협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게다가, 30도를 웃도는 폭염으로 방치된 시체들과 각종 오염물질의 부패가 가속화되어 부상자들의 2차 감염 확산 조짐이 일고 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는 셈이다. 고(故)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물과 위생은 공중 보건을 확립하는 첫번째 동력원이다.”라며 그 중요성을 늘 강조하였는데, 이는 분초를 다투는 재난의 현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처럼 물과 위생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분야를 전문용어로 Water and Sanitation (WATSAN) 이라 하며 긴급구호나 자연재난의 현장에서는 그 필요성이 꾸준히 증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홍수로 물이 범람하게 되면 주변의 수질은 급속도로 악화 되어 식수로 이용할 수 없게 되고, 지진 발생시 물리적으로 파괴된 인프라 시설은 수도관을 통해 더이상 물이 공급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런 악조건 에 놓인 사람들은 피로, 영양 부족, 스트레스, 불안감 등의 요인으로 질병에 걸려 죽거나 아플 확률 몇 배로 높아진다.

이때 고도로 훈련받은 수자원 전문가들이 투입되는데, 재난의 형태와 그 규모등 피해 상황을 분석한후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대응책 방안을 수립한다. 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수요량 추산, 주변의 이용가능한 수자원의 확보 및 오염원의 확산 방지를 위한 수원 보호, 수질분석과 식수, 생활용수 등 사용용도에 따른 단계별 정수처리, 세부적인 물 공급 디자인, 마지막으로 저장 시설 및 보관 조건과 관련된 일련의 총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실행 계획은 우선순위에 따라 3단계로 이루어 지는데, 생명을 구하기 위한 초기 대응, 2~6주간의 단기적 대응, 6주 후부터 안정화 될 때까지의 장기적 대응으로 나뉘고, 이중 신속한 초기 대응이 가장 중요시 된다. 일례로 식수 부족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데, 건물 잔해에 깔려 물을 공급받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36시간이 지나면 탈수증세를 보이며 그에 따른 심한 부작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충분한 양의 물을 공급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세계보건기구 (WHO)의 식수 기준에 부합될 수 있도록 정수처리와 지속적인 수질 모니터링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일반적인 단기 대응책으로는 이미 깨끗하게 처리된 물을 특수한 차량으로 이송해 공급하는 방식이 많이 쓰이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한 정수처리 기법을 이용하는 경우라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주변의 수자원을 이용할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 큰 저장 탱크에 빗물을 모아 이용하거나, 바닷물을 끌어와 담수로 바꾸는 수처리 기술을 이용해 식수로 사용할 때도 있다.
그 밖에, 전쟁과 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에서도 긴급구호 요원들을 쉽게 목격 할 수 있다. 고향을 잃은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난민촌과 같이 번잡하고 열악한 위생 시설에서 거주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의 물과 위생 또한 WATSAN 전문가들이 책임지고 있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MSF 는 오지의 난민촌에서 의료 활동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술이나 진료시 필요한 깨끗한 물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환자들에게 있어 의료장비만큼이나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끔 MSF 처럼 의료 단체에서 WATSAN 전문가들이 활동한다고 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한국에서는WATSAN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밝힌바 물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이자, 한편으로는 질병을 야기할 만큼 무서운 재앙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다. 이처럼 양날의 칼과도 같은 물을 매개로 긴급구호 현장에서 맹활약하는 WATSAN전문가들을 통해 이들이 인간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얼마만큼의 기여를 하는지를 조명해 봤다.

인간 존엄성을 상징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대표적인 물, 지금 이 시간에도 깨끗한 한 목음의 물을 확보하기 위해 지구촌 곳곳의 재난 현장을 누비며 희망의 물줄기를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을 고마운 분들에게 힘찬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 여기서 말하는 ‘위생’이란 일반적으로 화장실과 관련된 위생 시설을 의미한다.
글_김한철(UNDP, Water and Sanitation Specialist) 유엔개발계획 몽골지부 수자원 및 공중위생 전문가
아이티 공화국(Republic of Haiti)은 서인도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히스파니 올라섬을 도미니카 공화국과 공유한다. 섬의 서쪽 3분의 1과 인근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티’는 아라와크 어로 ‘산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며, 이름 그대로 국토의 4분의 3이 산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공화국들 중 유일하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이티는 최초로 독립한 흑인 공화국이자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이후 두 번째로 독립한 나라다. 하지만 잇따른 독재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주민 대부분이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인 흑인이며, 공용어는 프랑스어와 아이티 크레올 어이고, 종교는 국교인 가톨릭(80%)과 기독교(16%), 부두교 등의 기타 토속종교(4%)를 믿고 있다.
지난 1월 12일 현지 시각 오후 4시 53분 9초에 아이티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 인근 지표면으로부터 13킬로미터 깊이에서 발생한 강도 7.0의 지진은 23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아이티 대통령궁과 국회 의사당을 포함한 포르토프랭스의 주요 건물들이 붕괴되었거나 손상되었으며, 감옥 공항 병원과 같은 시설도 폐쇄됐다.

나는 굿피플 재난 구조단의 일원으로 긴급구호 활동과 의료캠프, 그리고 향후 재건 및 지역개발 사업을 위한 사전조사를 목적으로 20박 21일간의 일정으로 아이티를 방문했다. 아이티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멀었다. 뉴욕을 거쳐 도미니카로 들어가 육로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로 들어가기까지 꼬박 3일이 걸렸다.
호텔 등의 건물들이 거의 무너져버렸기에 우리 일행은 텐트를 치고 캠핑 생활을 해야 했으며, 물과 음식이 부족해 거의 씻지 않고, 가져간 라면과 햇반으로 끼니를 떼우며 지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참상보다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앞으로 다가올 부흥과 회복의 비전을 보고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충만해지는 경험을 했다.

현실적인 아이티의 상황은 분명 심각했다. 도시 전체가 무너져 버린 건물 잔해와 쓰레기로 뒤덮혀 있었고, 아이들은 거리에 몰려다니며 물 한 병을 얻기 위해 달려오는 트럭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곳곳에서 구호 물품을 얻기 위해 군인들의 통제 아래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 콩 한 봉지 때문에 폭도가 되기도 하는 사람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 모습 속에서 마음이 아파오기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아이티의 눈물을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티를 위한 모금을 많이 했는데 각 단체들이 정말로 영혼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잘 집행하길 소원하게 됐다.
아이티는 지진이 나기 전부터 매우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의 나라였다. 사람들은 진흙으로 과자를 구워 먹기도 하고, 문맹률은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나라였다. 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인해 아이티가 세계에 알려지고 수 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아이티를 돕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이티와 그 민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려 한다고 믿는다.
아이티 사역을 마쳐갈 즈음에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2월 10일 TV에 아이티 대통령이 나와 전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지금 아이티는 너무나 엄청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2월 12일부터 14일까지 모든 사람들이 오전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대통령 궁 앞에서 새벽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포르토프랭스를 비롯한 모든 지역에서 아침과 저녁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회를 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런 호소를 한 다는 것은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2월 12일 새벽에는 무너진 대통령 궁 앞에 150여 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도했다. 이 자리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도 함께 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일을 중단하고 곳곳에서 기도회를 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을 드리는 것을 보았다. 여러가지 다원화된 사상을 가지고 있던 신앙들이 하나님 한 분으로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니느웨 성의 회개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델마 75라는 산 위의 지역에서 의료 캠프를 3일간 했다. 원래는 이틀만 하기로 했는데, 하루 더 의료 캠프를 열게 됐다.
그 이유는, 캠프 마지막 날인 둘째날 모든 사람들과 이별을 하고 산을 내려왔는데 우리 팀의 카메라와 캠코더, 그리고 비행기 표를 넣은 가방이 분실됐다. 아마도 산 위의 캠프에서 잃어버렸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시 찾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일정 때문에 다시 산 위 마을로 갈 수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우리들의 이동 진료 사역을 도와주던 백삼숙 선교사님이 강권적으로 델마 75지역으로 하루만 더 가서 사역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선교사님이 하도 강하게 권하셔서 우리는 의료팀을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CPI 클리닉에서 진료를 하고, 절반은 다시 델마 75로 올라갔다. 그런데 올라가니 많은 사람들이 치료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우리가 다시 올 줄 알았을까.
뿐만 아니라 그 지역 리더가 우리가 잃어버렸던 카메라 가방을 가지고 왔다. 감사해서 사례를 하려고 하니, 우리를 도우러 온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전날 우리 카메라 가방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전달해 줄 방법을 찾다가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그 팀을 올려 보낼 테니 기다리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를 기다린 것이었다. 정말 소름이 끼쳤다.
아이티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한다. 아이티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절망의 땅이 희망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티의 회복을 통해서 전 세계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다스리심을 증거하실 것이다. 이 일에 우리 굿피플이 사용되어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아이티에 충분한 음식과 식수가 공급될 수 있도록, 무너진 건물 잔해와 쓰레기가 속히 치워지고 새로운 주거지 환경을 만들어지도록, 지진 당시 다친 사람들이 온전히 회복되도록, 아이티 사역을 하는 많은 단체들이 공정한 마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아이티 사역을 하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다스리심이 아이티 전역에 있을 수 있도록 중보기도하길 원한다.
- 굿피플 변성우 목사 -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했던가!
내게도 불현 듯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민간단체 해외봉사단으로서 케냐에 가게된 것이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행동하는 젊음이 되기 위해 나는 단번에 이 기회를 붙잡았다.

GPD1기교육과 해원협 합숙교육, 선배단원들과의 만남, 현지사업 인수인계 등 많은 교육을 받고난 후,
나는 의외로 아프리카에 대해 담담해졌다. 그곳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을 깨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양오현 회장님과의 간담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편견을 버리고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임하라.’...

‘사람’을 얻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인간관계,
그 속에서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배우고, 내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리라.
또 나는 그들을 향해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절대 ‘불쌍’한 사람으로 보지 않겠노라고. 그들의 삶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나는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불편한 삶에 안주하지 않도록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케냐로 간다.

커다란 변화의 돌풍을 불러일으키겠노라 말한다면 이는 큰 오만일 것이다.
다만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려할 때 그 곁에서 땀을 식혀주는 산들바람이 될 것이다.
‘굿피플, 일 참 잘하더라.’라는 말을 듣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이다.
앞으로의 1년이 나 김은아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그리고 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지만, 매순간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맡은 일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고 오겠다.
훗날 2010년을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게, 케냐와 진하게 사랑하고 오겠다.
-2010년 해외봉사단 김은아 단원(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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